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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화중독梅花中毒 - 이종협展
 전시기간 : 2010.09.09 - 10.06
 참여작가 : 이종협(Lee JongHyup)
 오 프 닝   : 2010.09.09 PM 6:30
 


『 매화중독梅花中毒 - 이종협展 』

Lee Jonghyup Solo Exhibition :: Drawing & Installation











▲ 이종협, 매화중독
캔바스에 드로잉, 240x240cm, 2010









전시작가 이종협(Lee Jonghyup)
전시일정 2010. 09. 09 ~ 2010. 10. 06
초대일시 2010. 09. 09 PM 6:00
관람시간 Open 10:00 ~ Close 19:00
∽ ∥ ∽
모리스갤러리(Morris Gallery)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 397-1
T. 042-867-7009
www.morrisgallery.co.kr









● 투명한 꽃그늘, 흰 그림자
- 이종협의 ‘매화중독梅花中毒’과 그림자회화의 의미

김종길(미술평론가)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 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 정지용, 「백록담」중에서, 1941

자연미술가 이종협은 1980년 이후 30년 동안 자연미술 활동에 참여해 왔다. 그는, 올해 9월 공주시 근방의 연미산에서 펼쳐지는 <2010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총감독이기도 하다. 자연미술은 자연(산 속의 숲이나 계곡, 바닷가 해변, 강변 백사장, 호수 주변, 그리고 들녘 등지)에서 자연(물, 풀, 나무, 잎, 바람, 불, 빛, 그림자, 곤충과 벌레, 구름, 돌…)과 인간의 교감을 통해 행해지는 야성(野性. 야성이야말로 인간의 순사한 자연적 본성이기에)의 미적활동(美的活動)이지만, 그는 자연미술의 미학을 어렵지 않게 풀어낸 판화작품도 오랫동안 연구하고 제작, 전시해 왔다. 자연미술을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작품들에서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있겠으나 실제로는 자연미술가 그룹 ‘야투(野投. YATOO)’가 30년 가까이 수행해 온 ‘사계절연구회 워크숍’에서만 그 본질적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판화에서 보여주었던 자연에 관한 미감을 ‘그림자회화’라는 낯선 형식의 작품들과 일부 설치작품으로 채운 것이다.

그의 그림자회화는 살아있는 식물이나 나무의 그림자를 그리는 방식이다. 초란이나 나무의 잎과 꽃이 자라는 과정을 그리고 그 옆에 그린 날의 일기를 적는 방식이 그것이다. 잎이 자라면서 넓어지고 기울고, 꽃을 피운 뒤 지는 모습을 그날그날의 그림자회화에 담는다고 생각해 보라. 오동나무 큰 가지 하나를 얻어다 수조에 넣은 뒤 그것의 그림자를 그려가는 과정 하나 : 넓은 잎이 이내 조금씩 시들기 시작하면서 사그라지는데 어딘가의 겨드랑이에선 새 싹이 돋아나니, 그림자회화 또한 수없이 많은 겹겹의 드로잉으로 그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동일하게 그 싹을 틔웠다. 이번 출품작은 그가 최근 흠뻑 빠져있었던 ‘매화’ 작품들이 주종을 이룬다. 전시주제도 그래서 ‘매화중독梅花中毒’이다. 지난 해 겨울, 작업실에 들어 온 매화가 긴 겨울을 견디며 다시 꽃을 피우고 잎을 틔우자 그는 매화 향기에 빠져들었다. 작가는 매화 옆에 캔버스를 두고 그림자를 상감하기 시작했다. 꽃이 활짝 핀 매화, 꽃 지고 잎이 자란 매화가 대련을 이룬 이번 전시의 대표작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런 그의 작품들은 자연미술의 미학과 동아시아의 오랜 회화 미학을 고루 담아내고 있다.






▲ 이종협, 14일간의 드로잉
실크스크린, D.P, 76x111cm, 2010







▲ 이종협, 그림자 드로잉1
롤 종이에 드로잉, 150x250cm, 2010







▲ 이종협, 그림자 드로잉2
롤 종이에 드로잉, 150x250cm, 2010




매화에 빠지다


옛 중국, 북송의 전당현[錢塘縣, 現 항저우(杭州)] 사람인 임포(林逋, 시호 和靖先生, 967~1028)는 평생 장가들지 않고 고요한 삶을 살다간 시인이다. 그는 젊은 시절 강회지방(江淮地方) 곳곳을 방랑했으나 마흔이 넘어서는 고향으로 돌아와 서호 근처의 고산에 띳집(草廬)을 짓고 은둔했는데, 정원에 매화를 심고 학을 놓아 길렀다. 그런고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매처학자(梅妻鶴子:매화를 아내로 두고 학을 아들로 둔 사람)’라고 불렀다. 후대에 그의 시를 묶어 펴낸 『임화정선생시집』에 「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시가 있다.

중방요락독훤연(衆芳搖落獨暄姸) 온갖 꽃들이 시들어 떨어져도 홀로 아름답게 남아,
점진풍정향소원(占盡風情向小園) 작은 정원의 정취를 독차지하고 있네.
소영횡사수청천(疏影橫斜水淸淺) 성긴 매화나무 그림자는 비스듬히 맑은 물위에 드러나고,
암향부동월황혼(暗香浮動月黃昏) 그윽한 매화 향기는 몽롱한 달빛 속에 감도네.
상금욕하선투안(霜禽欲下先偸眼) 서리가 내릴 때 날아 온 새가 먼저 앉으려고 살그머니 훔쳐보다가,
분접여지합단혼(粉蝶如知合斷魂) 흰나비가 혼이 빠져 앉아 있는 줄로 알겠구나.
행유미음가상압(幸有微吟可相狎) 다행히 나는 작은 소리로도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니,
불수단판공금존(不須檀板共金尊) 단판위에 앉아서 금잔을 나누지 않겠는가?

그의 시에서 매화는 홀로(獨) 아름답고, 정취를 독차지 한다(占盡風情). 온갖(衆) 꽃들 중에서 임포는 오직 매화만(盡) 아름답게 보았던 것이리라. 그것은 고고하고 청정한 임포의 성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매화의 그림자를 ‘소영(疎影:투명한 그림자)’이라하고, 매화의 향기를 ‘암향(暗香:그윽한 향기)’이라 했다. 매화의 자태는 ‘횡사(橫斜:비스듬히 기운)’로 표현하고, 매화의 운치는 ‘부동(浮動:둥실둥실 뜬)’으로 그렸다. 그림자는 물(水)에 어리고, 향기는 달빛(月) 속에 있으니 서릿발처럼 투명한 풍경이다. 그런 매화를 그는 살그머니 훔쳐보다가(先偸眼) 혼을 쏙 뺀다(合斷魂). 티 없이 맑되 칼 같은 글쓰기를 수행했던 시인의 풍모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종협은 수 년 동안 대전 시내의 한 건물을 임차해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그 작업실 옥탑에서 또한 수년을 살았다. 3년 전 그는, 매화 한 그루를 구입해 그곳 옥상에 두었다. 봄여름 가을은 밖에 두고 겨울이면 방으로 옮겼다. 꽃잎이 피고지고 하면서 매화는 훌쩍 자랐다. 지난 해 12월, 찬바람이 불어오자 이번엔 옥탑아래 작업실로 들여 놓았다. 새해가 되고 2월이 되니 나무는 작은 꽃망울을 틔웠다. 매화는 첫 꽃망울부터 향기를 뿜어냈다. 3월이 되자 꽃망울이 점점 커지더니 4월로 넘어가는 길목에 활짝 폈다. 밖이 아니어서 매화는 숨고르기 하며 천천히 꽃을 밀어 올린 것이다. 2월부터 4월까지 작업실은 매화 향기로 가득했다. 4월지나 꽃 진 자리에는 푸른 잎망울이 돋았다. 그는 ‘그윽한 향기’에 취해 매화를 ‘훔쳐보다가’ 문득 그것을 화폭에 옮겨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작업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정물화로 그리기엔 생생한 그 정취가 아쉽고, 옛 문인화 그리듯 먹을 치자니 그 또한 충분치 않았다. 무언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꽃이 아니어도 나무가 아니어도 매화의 ‘투명한 그림자’와 ‘그윽한 향기’를 고스란히 새겨 넣을 그 무언가가. 그리하여 고민 끝에 그가 찾아낸 방법이 일명 ‘그림자회화’이다. 드로잉 하듯 그리니 ‘드로잉회화’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것은 나무 옆에 큰 캔버스나 종이를 두고 그림자를 선묘로 그리는 방식이다. 그는 2월이 다갈 무렵부터 매화 옆에 캔버스를 세워두고 그렇게 그림자를 새겨 넣었다. 꽃망울이 터진 순간부터 그림자도 자라기 시작했다. 그림자를 따라 화폭의 그림자도 자랐다. 어떤 것은 아직 꽃망울이고 어떤 것은 이미 꽃이었다. 제각각 숨을 트는 시간이 달라서 그림자들도 제각각이다. 그는 그림자에 형형색색을 덧입히지 않았다. 자라는 그림자는 투명해서 마치 ‘흰그늘’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포가 그의 시에서 “성긴 매화나무 그림자는 비스듬히 맑은 물위에 드러”났다고 표현했듯 그 또한 맑은 물에 뜬 그림자처럼 투명하게 새겼다.

‘흰그늘’은 시인 김지하의 미학적 개념이기도 하다. 고통과 죽음, 질병이라는 명백한 현실을 뜻하는 ‘그늘’과 이를 벗어나려는 방향성, 희망을 의미하는 ‘흰 빛’ 사이의 관계를 압축한 개념인데, 김지하는 “그늘이 인생의 쓴맛과 단맛, 희로애락, 한을 표현한다면 흰빛은 신성함, 신명 같은 것과 관련”되고, “그늘과 흰빛, 한과 흥, 익살과 숭고미, 슬픔에서 신명에 이르는 통합적 미학”이라고 밝힌다. 그가 최근에 펴낸 시집 『흰그늘의 산알 소식과 산알의 흰그늘 노래』의 「유전자 자체」 한 구절을 보자.


차라리

반역이나 혁명인 패륜으로
그 族譜로부터 추방당해
사라진 자들의
기이한 전설의 빈틈을 연구해 보라


텅 빈 종이 뒤에 서리는
흰그늘에서
유전자 자체가 어느 날 말을 해올 것이다

그것은
바로


흰그늘은 “텅 빈 종이 뒤에 서”렸다. 그런 흰그늘은 ‘해그늘(日影)’과 다르지 않다. 김지하는 『삼국유사』 고구려편에서 유화 부인이 ‘해빛(日光)’이 아니라 해그늘을 껴안아 주몽을 잉태하는 사실에 주목하기도 했다. 이종협이 매화 그림자를 해그늘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가 작업실에서 문득 체험했던 매화의 흰 그림자(꽃그늘)와 무관치 않을 듯싶다. 그는 김지하가 보았던 “텅 빈 종이 뒤에 서리는/흰그늘”처럼 흰 그림자의 매화를 텅 빈 종이 위에 그리고 있지 않은가. 그가 그리는 매화는 나무의 몸통이나 뚜렷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에 따라 꽃망울을 오므리고 펼치는 순간들의 그림자인 것이고, 시들고 진자리에 다시 잎망울이 나서 자라는 한 순간의 점점들이다. 그의 그림자회화는 그래서 한 겹 두 겹, 서너 겹의 겹들이 쌓이고 부풀면서 시간의 결로 드러난 결의 회화이기도 하다. 새로운 결이 그려질 때 지나간 결의 그림자는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새 결의 틈에 박힌 ‘그늘’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자회화도 흰그늘의 미학에서 멀지 않다.

그의 흰그늘은 꽃그늘이다. 흰그늘은 꽃 그림자이고 꽃그늘은 흰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어제 그제 그리고 방금 사라진 그늘의 그림자이다. 그가 그림자를 새기는 순간에도 그림자는 조금씩 두께를 키운다. 그만큼 그늘은 그 시간의 틈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거기, 그림자와 그늘의 미세한 틈에 흰 빛이 있다. 그 빛이 꽃망울 피우고 두께를 늘리며, 또한 꽃을 지우고 잎망울 틔운다. 한 생명이 생명을 키우고 다른 생명이 한 생명을 지우는 것 사이에 언제나 흰 빛이 있다. 이종협은 바로 그 흰 빛에서 그림자의 형상을 쫓고 있는 것이다. 투명한 꽃그늘의 흰 그림자를.






▲ 이종협, 꽃잎2, LED, 30x30x3.5cm, 2009







▲ 이종협, 꽃잎1, LED, 30x30x3.5cm,2009




동아시아의 오래된 회화 미학에 ‘사의寫意’라는 개념이 있다. 사전적으로 그 개념은 “사물을 형상 그대로 정밀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유발된 것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화가의 심정(心情:意)을 묘사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그림의 핵심을 사물의 재현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정신에 두는 것을 말한다. 송대의 문인 소동파(蘇東坡)는 “그림을 볼 때 사실(寫實)만으로 보는 것은 어린애와 같다.”고 하였는데, 정신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꼬집음이다. 이종협은 사물의 그림자를 그렸으나 사물의 재현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다. 그는 매화꽃이 뿜어내는 향과 그 이후의 싹 틔움에서 매화의 고졸하고 담박한 정신을 엿본 것이다. 그의 그림자회화가 매우 사실적이거나 화려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는 실재를 그대로 본뜨길 원했으나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매화의 정신이요, 그 정신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자회화는 그의 심정 혹은 뜻이 드러난 사의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